편집자의 콕콕
'살기법' 설경구 "특수분장? 화실히 늙어보겠습니다" 본문
[더팩트|권혁기 기자] 무명 배우 성근은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회담 리허설을 위한 김일성의 대역 오디션에 합격한다. 생애 첫 주인공을 맡게 된 성근은 김일성의 말투부터 제스처 하나까지 필사적으로 몰입하지만 남북정상회담 무산으로 연기를 보여줄 수 없게 된다.
성근은 그로부터 20여년 후 스스로를 여전히 김일성이라고 믿는 아버지가 된다. 배우 설경구(50)가 영화 '나의 독재자'에서 연기한 인물이다. 설경구는 '나의 독재자'에서 김일성을 연기하는 대역 배우를 맡아 특수분장을 했다. 특수분장을 하는 시간만 5시간이 걸렸다. 아침 일찍 '촬영 콜'이 있는 날이면 새벽 1시나 2시에 분장을 받아야 했다.
설경구는 지난 7일 개봉된 '살인자의 기억법'(감독 원신연·제작 쇼박스·W픽처스·공동제작 그린피쉬·영화사이창)에서 예전에는 연쇄살인범이었지만 지금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병수(설경구 분)를 연기했다. 병수는 우연히 접촉사고로 만나게 된 남자 태주(김남길 분)에게서 자신과 같은 눈빛을 발견하고 그 역시 살인자임을 직감한다.
20대 딸 은희(설현 분)를 둔 아버지인 병수를 위해 설경구는 특수분장 대신에 '진짜로' 늙기를 자처했다. 설경구는 최근 서울 종로구 팔판동 카페에서 <더팩트>와 만나 "'나의 독재자'를 해봤기에 특수분장을 반대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아요. 찌는 모습보다는 건조한 캐릭터를 만들어야 할 것 같았죠. 쫙 빠진 모습을 보여주기로 마음먹고 제가 '늙어볼께요'라고 감독님께 말했죠. 기본은 살을 빼는 거였고, 이후 캐릭터를 위해 헤어나 의상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감독님도 처음에는 미안하니까 선뜻 말은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다음은 '불한당'에 이어 '살인자의 기억법'까지 연이은 호평을 받고 있는 설경구와 나눈 일문일답.
배우 설경구는 '나의 독재자'에 이어 '살인자의 기억법'에서도 노인 역할을 맡았다. '살인자의 기억법'이 '나의 독재자'와 다른 점은 특수분장이 아닌 진짜로 늙어버린 설경구라는 점이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위) '나의 독재자'(아래) 스틸-김영하 작가의 원작 소설을 읽어 봤나?
촬영 끝날 때까지 원작을 보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대본을 읽어보니 궁금해서 바로 읽게 되더라고요. 단숨에 읽었죠. 소설 자체만 놓고는 영화화하기에 무리가 있겠다 생각했어요. 망상인지, 현실인지 헷갈리게 하는 지점이 있는데 사실 소설에서는 병수 외에는 다 기능적인 인물들이었죠. 그러나 영화이다보니 대결구도로 갔죠. 상업적인 코드가 들어간 것이죠.
-황석정과 원하지 않는 러브라인이 있었는데. 호흡은 어땠나?
황석정과 이병준 배우, 두 분이 정말 재미있으셨죠. 황석정 씨는 제가 편하게 대하는 친구인데 '너 내가 진짜 죽일 것 같다'고 농담하곤 했죠. 병준이 형님은 몸짓을 너무 잘하시는 분이라서, 저라면 부끄러울텐데 뻔뻔스럽게 잘하시더라고요.(웃음) 목소리도 좋으셔서 더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설경구는 '살기법' 병수 역할로 인해 현장에서 암울했다고 말했다. 그는 "남길이나 설연이 오면 좀 화기애애했다"고 말해 웃음을 유발했다. /쇼박스 제공-병수 역할을 위해 준비한 것과 감정에 주안점을 둔 게 있다면?
준비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감독님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촬영 전에도 촬영 중에도 고민했지만 '용의자'나 '세븐데이즈'처럼 템포가 빠르고 컷이 확확 넘어가는 영화들과 색깔이 많이 달라 감독님 얘기를 많이 듣고 싶었고 들을려고 했습니다. 현장에 저만 있으면 좀 암울했죠.(웃음) 남길이나 설현이 오면 좀 화기애애해 지면서 스태프들 모습이 밝아지는 게 보이더라고요.(웃음) 감정에 있어서는 소설과 다르게 중반까지는 자기 살인에 대한 정당성, 은희와의 관계, 중반부터는 딸에게 집중했고, 김남길 등장 이후에는 목적이 뚜렸했죠.
-오줌을 먹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아는 후배 중에 고속버스 뒤에서 급한 나머지 페트병에 소변을 보고 놓고 가다가 목이 말라 마셨다는 친구가 있었어요. 치매가 아니더라도 먹는 사람이 있더라고요.(웃음) 개인적으로는 사과 쪼개지 못하는 장면과 물구나무 서면서 나온 웃음이 기억에 남습니다. 사람이라는 게 껍데기가 늙는거지 생각이 늙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갑자기 최근에 젊은 층의 팬들이 늘어났다.
뭔 일인가 싶었어요. '불한당' 개봉하고 칸에 갔다 오고 나서 변화가 된 것 같았죠. 당황했어요. 왜 이러지? '불한당' 때 줄 서서 영화를 보시는 분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계를 만들어 대관을 했다는 팬들도 있었죠. 정말 감동 받죠. 과분한 일이 느닷없이 생긴 것 같습니다. 눈물 납니다. 특히 손편지를 많이 받았는데 정성이 아니면 쓸 수 없잖아요. 편지지도 막 골라서 보내는 게 아니니까요. 직접 가서 사서 보내는 정성이 감사하죠. 스태프들이 '고목나무에 꽃 폈다'고 놀리는데 감사할 뿐입니다.
설경구는 '박하사탕'을 아직도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았다. 그는 '살기법'과 '불한당'에 대해 "큰 전환점인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쇼박스 제공-이번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박하사탕'의 영광을 재현하는 게 아닌가 싶다.
사실 '박하사탕'은 저에게 너무나 남다른 작품이죠. 현장 경험이 적어 카메라를 피하기도 했던 때에 만난 작품이라 징글징글하면서도 저한테 오는 감정은 다릅니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웃음) 물론 '살기법'이나 '불한당'이 굉장히 큰 전환점으로 온 작품인 것은 맞죠. 저에게 '늘 보이는 모습이 지겹다' '똑같은 연기'라는 댓글도 사실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보신 분들처럼 저도 피로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죠. '살기법'을 선택한 이유는 '어려울 것 같아서'였어요. 재미있을 것 같았죠. 그리고 저를 고민하게 만들 것 같았고요. 그때부터 얼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 같아요. '불한당'도 마찬가지로 '이 사람은 어떻게 살았고 어떤 얼굴을 갖고 살까?'라고 캐릭터에 대해 고민하면서 했던 작품입니다.
-김남길과 오랜만에 만났다.
남길이는 늙지 않는 것 같아요. 현장에서 똑같더라고요. 스태프들을 편하게 대하는 것도 그렇고요. 장난하다가도 촬영장에서 변하는 모습들, 스태프들도 거부감이 없지만 남길이는 선을 딱 지켜요. 예민할 수 있는데 스무스한 친구죠.
-오달수, 설현과는 어땠는지?
저는 오달수 씨 연기가 참 좋아요. 맛있게 연기하잖아요? 팬이기도 하고 친하기도 한데, 일상의 오달수에게 있는 매력이 있죠. 그러면서 오달수가 아닌 매력도 있어요. 묘한 얼굴이죠. 설현이도 너무 좋았어요. 자기도 욕심을 냈는데 '가수 설현'도 좋지만 '배우 설현'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살인자의 기억법'의 매력을 꼽자면?
소설과 다른 맛. 같은듯 다른 맛. 소설과 같은 맛이면 달랐을 것 같습니다. khk0204@tf.co.kr [연예팀 | ssent@tf.co.kr]